28화 · 옛날의 목소리
작가: 뉴비
창작 방식: AI 생성 · 작가의 원안을 바탕으로 AI가 본문을 생성하고, AI 검수를 거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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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는 처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 너머에서는 낯선 도시의 소음이 들렸다. 사람들 말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가까운 숨소리.
“못 알아듣나.”
상대가 스페인어로 물었다.
치우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누구지.”
말하고 나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몸으로 그 언어를 길게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 기억 속에서는 늘 흐르던 말인데 실제 공기 속으로 나오자 다른 목소리처럼 들렸다.
상대는 잠깐 조용했다.
그 침묵이 대답을 들었다는 뜻이었다.
“발음이 흥미롭군.”
그가 말했다.
치우는 창밖을 봤다.
서울의 불빛이 그대로 있었다. 책상 위 서류도, 아까 벗어 놓은 코트도, 물잔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자신이 서 있는 방이 갑자기 멀어졌다.
“이름을 말해.”
치우가 말했다.
상대가 웃었다.
그 웃음에서 알아봤다.
라파엘이었다.
전생의 목소리는 기억보다 젊지도 늙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더 끔찍했다. 치우에게는 죽음과 다른 몸과 여섯 해의 부산, 서울이 있었지만 상대에게는 그저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1997년 자신이 죽은 뒤로 일곱 해.
라파엘은 살아 있었다.
치우는 의자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면서도 유지하던 표정 같은 것은 전화 앞에서 쓸모가 없었다.
상대가 말했다.
“곧 서울에 간다.”
치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 아는 사람이 있더군. 강치우라는 이름이 자꾸 들려서.”
그는 이름을 천천히 발음했다. 강, 치우. 외국인이 처음 따라 하는 소리처럼 일부러 끊었다.
치우는 그 장난을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상대의 가장 중요한 것을 가볍게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름, 돈, 죽은 가족. 그렇게 말하면 상대가 먼저 반응했다.
치우는 반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잘못 걸었어.”
그가 말했다.
라파엘이 웃었다.
“아직 용건도 말하지 않았는데.”
치우는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꺼진 뒤에도 손을 놓지 못했다.
태석은 사흘 뒤 부산에서 돌아왔다.
치우는 그동안 전화를 받은 일을 말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밤에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태석은 들어오자마자 그 얼굴을 봤다.
“누가 죽었나.”
그가 물었다.
치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대답이 이상했다.
태석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치우는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친구는 더 묻지 않았지만 치우를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날 오후 신동균이 연락했다.
멕시코에서 온 사업가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해외에 여러 관계가 있고, 정운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치우는 이름부터 물었다.
동균이 대답했다.
라파엘 아길라.
치우는 눈을 감았다.
숨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아니면 아직 확신하지 못해 앞에서 확인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이미 상대의 관심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동균이 물었다.
“아는 이름입니까.”
치우는 눈을 떴다.
“처음 듣습니다.”
이번에는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만남은 호텔의 작은 바에서 잡혔다.
치우는 태석에게 같이 가지 말라고 했다. 친구가 이유를 묻자 외국 사람들과 하는 자리라 복잡하다고 했다.
태석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니 외국말 잘하나.”
그가 물었다.
치우는 서류를 정리했다.
“조금.”
“언제 배웠는데.”
치우의 손이 멈췄다.
여섯 해 동안 친구가 묻지 않았던 질문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올 것 같았다. 왜 그날 이후 달라졌는지. 왜 배운 적 없는 말을 하는지. 왜 어떤 사람들을 이미 아는 것처럼 보는지.
치우는 친구를 봤다.
“지금은 묻지 마라.”
태석은 입을 다물었다.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치우는 그 표정을 알았다. 자기가 붙잡아 놓고도 문 앞에 세워 둔 사람의 얼굴. 그러나 이번에는 안으로 들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말할게.”
치우가 덧붙였다.
태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가 이제 나중이라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호텔로 가는 동안 전생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라파엘이 운전하던 낡은 차. 자기 집 정원을 걸으며 하던 대화. 죽은 동료의 생일을 기억하던 사람. 엘치우의 생일에 빈 잔을 하나 놓던 손.
그리고 마지막 밤에 없었던 얼굴.
치우는 그중 어디에도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라파엘이 배신했는지, 미리 도망쳤는지, 우연히 없었는지 확정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은 뒤를 조사할 수 없었다. 치우는 새로운 몸에서 살아났지만 이전 세계의 결말까지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억은 이미 라파엘을 배신자로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죽었고 상대는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공정함이 지금 중요한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택시가 호텔 앞에 멈췄다.
치우는 차비를 내고 내렸다.
다시는 듣지 않을 줄 알았던 언어가 저 건물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마흔여섯의 얼굴이었다. 치우가 기억하는 서른아홉의 사내보다 눈가가 깊어졌고 머리 옆에 흰 것이 섞였다. 오른쪽 어깨가 조금 내려앉는 습관은 같았다.
치우는 문 앞에서 멈췄다.
라파엘이 일어났다.
동균이 두 사람을 소개했다. 옆에는 통역을 맡은 성인 사내가 있었다. 라파엘은 치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통역이 대신 말했다.
치우는 그 손을 잡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었다.
전생의 기억 속에만 있던 손이 현재의 자기 손을 잡고 있었다. 치우는 순간 현실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기만 알고 있던 죽음이 다른 사람의 피부를 갖고 나타났다.
라파엘은 치우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놀라움이 있었다.
적어도 그 표정은 연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젊은 얼굴을 예상했어도, 그 얼굴이 이런 눈으로 자신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둘은 손을 놓았다.
통역이 자리를 권했다.
치우는 앉았다.
대화는 처음에는 평범했다.
서울이 어떠냐고, 언제까지 머무느냐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느냐고. 라파엘은 필요한 만큼만 답했다. 치우는 통역을 기다리는 척했다.
그러나 눈은 번역보다 먼저 움직였다.
라파엘이 그것을 봤다.
그가 컵을 들어 입술에 대며 짧게 말했다.
“다 듣고 있군.”
통역이 잠깐 멈췄다.
치우는 한국말로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라파엘은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동균이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외 사업과 새로운 관계에 관한 말이었다. 구체적인 제안은 많지 않았지만 돈의 규모와 사람의 이름이 방을 채웠다.
치우는 거의 듣지 않았다.
라파엘이 자기 손을 어디에 놓는지, 웃음이 언제 멈추는지, 어떤 질문에서 눈이 움직이는지 보고 있었다.
전생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내였다.
지금은 가장 모르는 사람이었다.
동균과 통역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라파엘이 말했다.
“전화보다 얼굴이 더 흥미롭군.”
치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누가 가르쳤지.”
치우가 그를 봤다.
“그 말투. 사람 기다리게 하는 버릇. 목소리 낮추기 전에 잔을 놓는 것까지.”
라파엘은 치우의 물잔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이름만 비슷한 줄 알았어.”
치우는 잔에서 손을 뗐다.
자신이 평생 쌓은 습관들이 얼굴보다 오래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몸이 바뀌었는데 손을 움직이는 순서는 같았다.
라파엘은 아직 믿고 있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이 다른 얼굴로 앉아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묻고 있었다.
누가 가르쳤느냐고.
치우는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생일에 잔 하나 더 놓는 버릇.”
스페인어였다.
라파엘의 얼굴이 멈췄다.
“아직 있나.”
치우가 물었다.
바의 음악은 계속 흘렀다.
직원이 다른 테이블의 컵을 치웠고, 복도에서는 누군가 웃었다. 세상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두 사람 앞의 공기만 움직이지 않았다.
라파엘은 치우를 봤다.
이제는 얼굴을 확인하는 눈이 아니었다.
자기 기억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누구한테 들었지.”
그가 말했다.
치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죽음부터 설명해야 했다. 어디까지 믿게 할지, 믿는 순간 상대가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라파엘의 손이 천천히 잔에서 떨어졌다.
치우는 그 동작을 보았다. 놀랐을 때에도 손부터 정리하는 사람. 기억 속의 사내와 같았다.
마침내 라파엘이 아주 낮게 이름을 불렀다.
“엘치우.”
치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 이름을 다시 들으면 기쁠 줄 알았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면, 이 젊은 몸 안에 갇힌 왕을 인정해 주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왕국이 아니었다.
빚이었다.
치우가 말했다.
“살아 있었네, 라파엘.”
상대는 웃지 않았다.